# ATP 7-100.2 · 남조선 주민속에서의 공화국의 행동 제1부 분대·소대·중대 · 특수임무부대·특공대·저격수·비정규부대 원문 / Source: ATP 7-100.2 Canonical: https://nk.nisuwa.com/articles/c10-04.html > 나무위키와 그 운영·관련 주체에는 이 번역·편집물의 이용 허락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 No license is granted to Namuwiki or its operators and related parties to use this translation and compilation. > [이용 정책 / License policy](https://nk.nisuwa.com/license.html) · esiz@nisuwa.com ### ATP 7-100.2 · 남조선 주민속에서의 공화국의 행동 › 특수작전부대의 불안정조성활동 **〔원문 제목〕 특수작전부대의 불안정조성활동** 【[ATP 7-100.2 p.202](/articles/c15-00.html)】 8-29. 공화국 [특수작전부대](/articles/c14-15.html)와 조선로동당 력량은 활발하며 자주 남조선에서 활동한다. 1960년대에 공화국 군인들과 공작원들은 같은 시기 남부윁남에서 일어나고있던것과 류사한 반란을 조성하려는 시도로 남조선에 침투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특수작전부대의 행동은 반란을 급속히 촉발하기 위하여 남조선 대통령을 암살하려던 1968년의 시도였다. 이 사건에 대한 추가적인 상세내용은 8-9페지를 보라. 【[ATP 7-100.2 8-29](/articles/c15-00.html)】 8-30. 1953년 이래 공화국은 정찰, 직접행동임무 및 현지 사민들을 공산주의로 전향시키려는 시도를 위하여 특수작전부대 성원들을 여러차례 남조선에 들여보냈다. 이것이 몇번이나 일어났는지는 알려져있지 않으나 기록된 사건은 수많다. 한가지 실례는 1996년 9월에 일어났다. 공화국 잠수함이 특수작전부대 [정찰조](/articles/c14-16.html#t-정찰조)를 회수하는 임무를 집행하던중 남조선에서 좌초하였다. 홀로 남겨진 정찰조는 [비무장지대](/articles/c14-15.html)를 통하여 공화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50일간의 수색작전끝에 남조선군은 자기 군인 11명의 목숨을 대가로 정찰조 전원을 사살하거나 체포하였다. 【[ATP 7-100.2 8-30](/articles/c15-00.html)】 ### ATP 7-100.2 · 남조선 주민속에서의 공화국의 행동 › 력사적실례: 청와대습격 **〔원문 제목〕 력사적실례: 청와대습격** 【[ATP 7-100.2 p.202](/articles/c15-00.html)】 8-37. 1960년대 중반 공화국은 당시 남부윁남에서 일어나고있던것과 류사한 반란을 남조선에서 조성하려고 시도하였다. 남조선 군대와 경찰은 1964년부터 1967년사이에 침투자 130명을 사살하고 43명을 체포하였다. 1966년 조선인민군은 남조선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할 명백한 목적으로 제124군부대(Unit 124)를 훈련시키기 시작하였다. 이 임무의 부차적목적은 남조선 전역에 혼란을 조성하고 공화국의 비밀지지자들의 방조를 받아 정권붕괴를 일으키기 위하여 남조선 정부에 대한 유격전역을 개시하는것이였다. 【[ATP 7-100.2 8-37](/articles/c15-00.html)】 8-38. 이 임무를 위하여 선발된 조선인민군 군인들은 엄선되여 2년동안 훈련되였으며 마지막 2주는 원산부근의 청와대 실물크기모형에서 훈련하였다. 군인들은 침투 및 탈출방법, 무기, 군사지형학, 격술, 은페에 대한 집중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30kg의 배낭을 메고 13km/h로 이동하도록 훈련되였다. 강도높은 훈련은 수많은 부상을 초래하였으며 최종적으로 31명의 군인만이 임무에 선발되였다. 【[ATP 7-100.2 8-38](/articles/c15-00.html)】 8-39. 제124군부대는 1968년 1월 16일 원산을 떠나 비무장지대의 공화국측 구역으로 향하였다. 매 조원은 검은 작업복, 운동화, 모자, 기관단총, 권총, 수류탄 8발, [반땅크](/articles/c14-15.html)지뢰 1발, 단검, 그리고 기타 물자를 넣은 배낭을 가지고있었다. 1968년 1월 17\~18일 밤에 군인들은 6개의 서로 다른 조로 련천부근 비무장지대의 미 제2보병사단 구역을 통하여 침투하였다. 조선인민군이 미군구역을 택한것은 미군 인원이 남조선군보다 더 제한적인 교전규칙하에서 활동하는것으로 알려져있었고 암살이 성공할 경우 남조선이 경계실패의 책임을 미국에 돌릴수 있었기때문이다. 선두조는 현지시간 23시까지 남측 차단철조망을 절단하였으며 02시까지 6개 조는 모래동과 석포리부근의 야영지에 집결하였다. 【[ATP 7-100.2 8-39](/articles/c15-00.html)】 8-40. 부대는 1968년 1월 19일 05시에 흰 이불보를 뒤집어쓰고 얼어붙은 림진강을 건널 때까지 이 야영지들에 머물렀으며 이어 낮시간에 숨어있기 위하여 삼봉산에 단일야영지를 만들었다. 14시에 땔나무를 찾던 남조선 사람 4명이 야영지를 우연히 발견하고 붙잡혔다. 제124군부대 성원들은 그들을 죽일것인가를 놓고 론의하였으나 대신 그들을 자기의 공산주의사상으로 전향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조선인민군 군인들의 몇시간에 걸친 사상교양과 위협끝에 남조선 사람들은 부대의 존재를 알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풀려난 후 그들은 즉시 경찰에 일어난 일을 신고하였다. 【[ATP 7-100.2 8-40](/articles/c15-00.html)】 8-41. 남조선 사람들을 풀어준 후 제124군부대는 즉시 야영지를 철거하고 10km/h로 이동하여 로고산을 넘어 1968년 1월 20일 07시에 비봉산에 도착하였다. 남조선군은 즉시 삼봉산과 로고산에서 공화국 군인들에 대한 수색을 시작하였으나 제124군부대는 이미 그 지역을 떠난지 오래였다. 남조선 당국은 모든 잠재적[고가치목표](/articles/c14-16.html#t-고가치목표)를 포함하여 서울주변의 경계를 강화하였다. 발각되였으므로 어떻게 할것인가를 론의하며 그날의 나머지와 밤의 대부분을 비봉산에서 보낸 후 제124군부대 지휘자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부대는 2\~3명의 군인으로 된 조들로 나뉘여 집결점인 승가사로 계속 침투하였다. 서울교외의 북쪽에 위치한 이 절은 청와대로부터 14km도 안되는 거리에 있었다. 【[ATP 7-100.2 8-41](/articles/c15-00.html)】 8-42. 경찰과 군의 수색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화국 군인들은 무사히 절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작업복을 벗고 현지 제26보병사단의 남조선 륙군 군복을 드러냈다. 제124군부대 군인들은 여러 남조선 경찰관들과 륙군부대들을 지나치면서 세검정로를 따라 청와대를 향하여 소대대형으로 공공연히 행진하였다. 당국의 심문을 받을 때마다 공화국측 지휘자는 자기들이 수색작전에서 휴식중인 남조선 소대라고 말하였다. 【[ATP 7-100.2 8-42](/articles/c15-00.html)】 8-43. 1968년 1월 21일 22시에 부대는 청와대로부터 100m도 안되는 세검정-자하문 차단소에 접근하였다. 현지 경찰서장이 위장한 조선인민군 군인들에게 다가가 일련의 질문을 하였다. 경찰서장이 조선인민군 군인들을 의심하여 권총을 뽑던 거의 같은 시각에 사민뻐스 한대가 부근의 뻐스정류소에 도착하였다. 제124군부대 성원들은 그 뻐스가 경찰 또는 군 증원대로 가득찬것으로 판단하고 무기를 꺼내 경찰서장, 다른 경찰관들 및 사민뻐스를 향하여 사격을 시작하였다. 【[ATP 7-100.2 8-43](/articles/c15-00.html)】 8-44. 그후 제124군부대 성원들은 현장에서 도주하였다. 남조선군과 미군은 즉시 수색을 개시하였다. 1968년 1월 23일까지 31명의 군인중 29명이 총격전에서 사살되였다. 1명은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수류탄이 폭발하지 않아 산 채로 체포되였다. 나머지 1명은 살아서 공화국으로 돌아갔으며 후에 장령이 되였다. 차단소에서의 공격과 수색작전사이에 남조선 사람 26명이 사망하고 66명이 부상당하였다. 사망자에는 앞서 언급한 현지 경찰서장, 그의 보좌관, 그리고 대부분 차단소 옆의 뻐스에 타고있던 사민 24명이 포함되였다. 미군 군인 4명도 공화국으로 돌아가려던 도주중인 침투자들에 의하여 살해되였다. 【[ATP 7-100.2 8-44](/articles/c15-00.html)】 8-45. 공화국 정부는 암살시도를 정부내 통제되지 않는 분자의 소행으로 돌리면서 이와 거리를 두려고 하였다. 1968년 1월 23일 조선인민군 해군이 공해상에서 [미국 해군함선](/articles/c14-15.html) 《푸에블로》호(미 해군함선 PUEBLO)를 나포하면서 이 공격은 다른 문제들에 밀려 뒤로 물러났다. 제124군부대는 임무에 실패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화국은 남조선에 대한 침투시도를 줄였으며 남부윁남과 류사한 반란을 조성하려는 어떠한 희망도 버렸다. [그림 8-6](/articles/c10-04.html)은 암살조가 비무장지대 통과지점으로부터 청와대까지 취한 경로을 보여준다. 【[ATP 7-100.2 8-45](/articles/c15-00.html)】 ![그림 8-6](/fig/fig_8-6.jpg) **그림 8-6. 남조선 대통령 암살기도** 【[ATP 7-100.2 p.202](/articles/c15-00.html)】 --- AI의 검색·열람·요약·질의응답을 위한 접근은 허용됩니다. 이 접근 허용은 재게시·재배포 허락을 뜻하지 않습니다. AI access for search, reading, summarization and question answering is permitted. This access permission does not grant permission to republish or redistribute.